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 김하윤 교수.
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 김하윤 교수.

새로운 정부가 출발한 지 두 달이 돼 간다. 여느 정부처럼 국민의 여망을 실어 호기롭게 출범했지만, 어느 정부보다도 불안한 항해를 이어가고 있다.

어퍼컷이 무색하게 대통령과 정권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지지율의 하락으로 이어지고, 이른바 ‘핵관’들의 몸값만 연일 높아지고 있다.

대통령이 처음(?)인 위정자를 위해서 충심으로 보좌하는 것이라고 믿고는 싶지만, 문고리 틈으로 들려오는 소식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새다. 이러한 측근 정치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인들 어련하겠는가.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는 지도자의 능력보다 주변에 현명한 신하가 있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가 바라는 지도자와 신하를 성군(聖君)과 현군(賢君), 간신(諫臣)과 쟁신(諍臣)이라고 칭한다.

간신이나 쟁신은 임금의 잘못을 간쟁(諫諍)하는 신하이기에 공자도 임금의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보면 당연히 간쟁을 해야 천하를 잃지 않는다고 하였다. 후손인 공안국은 임금의 총애만 믿고 자리를 지킨 채 간쟁하지 않는 신하를 “나라의 간인(國之姦人)”이라고 깔끔하게 정리했다.

‘쟁(諍)’은 <설원>에서 ‘임금에게 할 말을 다하여 임금이 쓰면 좋고 쓰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有能盡言於君, 用則可生, 不用則死, 謂之諍.)’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왕에게 고하는 직간(直諫)의 수용 여부가 신하의 생명과 직결된 것이고, 나아가 군신(君臣)의 협력과 소통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이는 “천자에게 간하는 신하 일곱 명만 있으면 비록 임금이 무도하더라도 나라를 잃지 않는다(天子有爭臣七人, 雖無道, 不失其國.)”라는 쟁신의 중요성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누군들 직언하는 사람이 달가울까 싶다. 입바른 소리로 자신의 결점을 말하는 것이 그리 반갑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만인지상(萬人之上)에 있는 위정자는 말해서 무엇하랴. 신하 또한 목숨을 담보로 귀에 거슬리는 말로 노여움을 사서 지존의 심기를 건들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주역>에서는 간하는 것을 호랑이 꼬리를 밟는 일에 비유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했으니, 밟힌 꼬리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호랑이는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신하는 될 수 있지만, ‘아무나’ 쟁신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군신 사이에 언로(言路)의 소통이 중요하기 때문에 위정자는 간쟁하는 신하의 의견을 받아들여 국정의 중심을 잡아가야 한다.

이익은 “임금이 간하는 신하가 없는 것을 근심할 것이 아니라,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함을 근심해야 할 것”이라고 경계했다. 간하는 신하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임금의 태도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예나 지금을 막론하고 위정자에게는 감언(甘言)하는 간신(奸臣)이 아니라 고언(苦言)하는 간신(諫臣)이 필요하다. 감언에 몰락한 걸왕과 고언에 번창한 탕왕의 사실(史實)이 주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진영논리를 떠나 국민 모두가 간신(諫臣)이 돼야 한다. 위정자도 ‘이청득심(以聽得心)’의 태도가 국정 운영의 진리라는 것을 모를 리 없으므로 국민이 정하는 공정과 상식의 기준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간언하는 신하는 거울과 같아서 간신이 없으면 위정자는 영영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역대 정권만 봐도 소통을 강조만 할 뿐 좋은 마무리로 이어진 위정자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쓴 약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충고의 말을 귓등으로 들어서야 되겠는가.

위정자는 하루라도 빨리 귀와 가슴을 열어 진심으로 직언을 권장하고[求諫], 실천에 옮기며[納諫], 포상을 하는[償諫] 풍토를 조성해 국민 모두가 핵관이 될 수 있는 ‘삼간정치(三諫政治)’의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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