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약간의 돈으로 배 한 척을 사련다. 배 안에는 어망 네 댓 개와 낚싯대 한두 개를 벌려 놓고, 솥과 그릇, 술잔과 쟁반 등 여러 가지 부엌살림을 갖추고, 방 한 칸을 만들어 아궁이를 놓고 싶다.” 위 시는 다산 정약용이 정조 승하 직전 1800년(정조 24) 4월 무렵에 지었다. 그 무렵 다산은 낙향했다. 오랜 당쟁에 지친 다산은 차라리 홀가분했다. 다산은 개인적으로 작은 소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물에 떠다니면서 살림을 하고 사는 배를 갖는 일이다. 남양주시 수종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
“아, 애통한 일일세! 내 일찍이 친구를 잃은 슬픔이 아내 잃은 슬픔보다 훨씬 크다고 말한 적이 있었네. 아내를 잃은 자는 두 번, 세 번 재혼할 수도 있고 첩을 얻는다 해도 안 될 것이 없네. 마치 솔기가 터지고 옷이 찢어지면 깁거나 꿰매면 되고, 기물이 깨지거나 이지러지면 새것으로 바꾸면 되는 것과 같은 걸 테지. 그러나 어찌 친구와 같겠나.”연암 박지원이 어떤 이에게 보낸 편지다. 그는 1792년 1월, 경남 함양군 안의 현감에 부임해 1796년 2월까지 있었다. 이 편지는 1793년 1월에 세상을 뜬 이덕무(1741-1793
다산은 15살이 된 1776년 2월 22일에 결혼했다. 부인 풍산 홍씨 혜완은 다산보다 한 살 위 16세. 명문가 규수로서 시문(詩文)에도 능했다. 혼인은 혜완의 아버지(홍화보)가 같은 남인인 다산의 아버지(정재원)와 뜻이 맞아 정했다. 홍화보의 외동딸인 혜완은 한양의 남산골에서 나서 곱게 자란 서울 규슈였다. 유교적 소양을 갖춘 무관인 홍화보는 바로 전해에 승정원의 동부승지에 임명됐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의 비서관 격이니 한가닥하는 집안이었다. 반면에 다산의 총명함은 익히 소문이 낫지만, 배를 타야 갈 수 있는 경기도 광
“문 앞에는 빚쟁이들이 기러기처럼 늘어섰는데, 방안에는 취한 사람들이 고기 꿰미처럼 잠자고 있네.” 당나라 때 한 호걸이 지은 시입니다. 요즘 저는 찬 방에서 홀로 지냅니다. 담담한 품은 마치 참선에 든 중과 같습니다. 다만 문 앞에 기러기처럼 줄 선 자들 눈빛이 너무 가증스럽군요. 매번 비굴한 말씀을 드릴 때마다 등(滕)·설(薛)의 대부를 떠올리곤 합니다.벼슬에 오르기 전 연암 박지원이 매형 성백에게 보낸 편지다. 결론부터 말하면 돈 좀 꿔달라는 SOS. 연암은 이런저런 문헌과 고사를 들어 빙빙 돌려 말한다. ‘돈’이란 말은 절대
“귀하게 되면 인색해지고, 부유해지면 더러워지고, 오래 살면 포악해진다. 인자하고 진실한 자에겐 요절이 뒤따르고, 깨끗하여 찌꺼기 없는 자에겐 가난이 깃든다. 베풀기 좋아하고 주는 것 많은 자는 높은 벼슬이 없다. 이 여섯 가지 덕 중에 내 장차 어느 것을 택할 꼬.”연암 박지원의 중에 나온 글이다. 에서 근간(根幹)을 이루는 부분은 과 라고 할 수 있다. 연암의 초기작부터 만년작까지 망라하여 전체 산문의 절반이 넘는 글들이 여기에 정선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상각(煙湘閣)
양계장 안에 갇혀 살며 알만 낳던 암탉 ‘잎싹’. 마당으로 나가 자유롭게 살면서 알을 품어보기를 꿈꾼다. 몇 날 며칠을 굶어 폐계 흉내를 낸다. 드디어 뒷산 웅덩이에 버려져 마당을 나오는데 성공한다. 그것도 잠시. 애꾸눈 족제비에게 잡아먹히기 일보 직전! 청둥오리 나그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그러던 어느 날, 버려진 오리알을 발견하고 난생처음 알을 품게 된다. 어른을 위한 동화 이야기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300년 전 닭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조선 후기 실학의 태두인 성호 이익은 열심히 닭을 길
“학유아. 잘 지냈느냐? 네가 닭을 기른다는 말을 들었다. 참으로 잘한 일이다. 하지만 이 일에도 품위 있고 저속하며, 깨끗하고 더러운 것의 차이가 있다. 먼저 농서(農書)를 많이 읽고, 좋은 방법을 가려 시험해 보거라. 더러 닭의 색깔과 품종을 달리해 길러도 보고, 닭의 보금자리와 횃대(닭장 안에 가로지른 막대)를 다르게 해 보거라. 이왕 닭을 기를 바에야 연구하고 품종을 개량해 다른 집 닭 보다 더 살찌고 번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가가 나면 닭의 정경과 닭 기르는 너의 마음을 시로 지어 읊어 보거라. 이런 것들이야말로 공
연암 박지원은 에서 “내 평생 기이하고 괴상한 볼거리를 열하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대부분 그 이름을 알지 못했고,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기록하지 못하니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회고했다. 코끼리를 사육하는 ‘상방(象房)’이나 호랑이 우리 ‘호권(虎圈)’은 북경을 찾는 사신 일행이 즐겨 찾은 관광지의 하나였다. 연암이 중국에서 본 동물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코끼리였다. 연암은 에서 두 차례에 걸쳐 코끼리를 설명했다.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황제의 의장대로 부리는 코끼리를 열
“아, 슬프다! 한나라 낙랑군이 있었던 평양은 지금 평양이 아니라 요동의 평양이었다. 그런데도 한사군을 압록강 안으로 몰아넣어 조선의 강토가 줄어들었도다.”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 제1권 도강록의 한 구절이다. 240년 전의 글이다. 북한 평양을 낙랑군이라고 못 박은 지금 강단 사학계와 평행이론이 느껴진다. 연암의 북경 여행길은 탄식으로 시작된다. 연암이 44세 때인 1780년(정조4) 6월 24일(음력) 때였다. 청 건륭제의 70세 생일 축하사절단으로 중국에 가는 팔촌 형 박명원을 따라 연암은 6개월간 6천 리 여정에 나섰다.
고양이는 언제부터 인간과 함께 살아왔을까? 지난 2004년 프랑스 과학자들이 지중해 키프러스 섬에서 9500년 전의 고양이 유해를 발견했다. 인간의 유해와 나란히 있었고, 귀중품이 함께 묻혀 있던 걸로 봐서 고양이가 죽은 이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였던 것 같다. 프랑스 과학자들의 발견은 인간이 농경 생활을 시작할 무렵부터 고양이를 애완용으로 길들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곡식을 탐내는 쥐를 쫓으며 인간과 함께 생활해온 것. 고대 이집트에서는 고양이를 신으로 숭배했다. 사자 몸통으로 알려진 스핑크스는 본래 고양이다. 주인이 죽으면 주인의
그때 그 시절 학교 전체가 송충이 잡는 날이 있었다. 그날은 반드시 깡통 하나씩을 준비해야 했다. 즉석 나무젓가락을 만들어 송충이 포획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짓궂은 남자애들은 송충이로 여자애들을 괴롭혔다. 아예 징그러워 도망치는 애들도 있었다. 지금은 살충제를 실은 헬리콥터가 산허리를 훌쩍 넘어갔다 오면 ‘방제 끝’이지만, 그땐 송충이가 왜 그리 많았을까? 소나무는 한자로 송(松). 중국 진시황이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다. 소나무 덕에 피할 수 있게 되자, 고맙다는 뜻으로 공작 벼슬을 내렸다. 그때부터 소나무를 ‘목공(木公)’이라 부
눈이 내리는 날, 친구를 마주하고 화로에 고기를 굽는다. 방안은 열기로 후끈하다. 파, 마늘 냄새와 고기 굽는 냄새가 몸에 밴다. 이윽고 연기가 가득해지자 잠시 바람을 쐰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장면 아닌가? 사람들과 어울려 고기 구워 먹는 모습이 쉽게 연상된다. 주인공은 바로 연암 박지원이다.“온 방안에 연기와 냄새가 가득 차자, 김공(金公)은 먼저 일어나 나를 이끌고 북쪽 마루로 나아갔다. 그는 부채를 부치며 ‘그래도 맑고 시원한 곳도 있으니, 가히 신선이 사는 곳과 그다지 멀지 않네그려’라고 말했다. 밖을 내다보니, 하인들이
꿈에 한 누각으로 들어갔다. 연암 박지원이 18~19세 시절이었다. 마치 관청 건물이나 절간의 대웅전 같았다. 좌우에 비단으로 덮은 상자와 서가가 가지런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가운데 화병에 꽂힌 채 지붕에 닿을 만한 푸른빛의 새 깃털을 보았다. 공작이었다. 훗날 연암은 생계형 관직에 나가 1791년 경상도 안의 현감으로 부임했다. 연암은 그곳의 아름다운 산수에 무척 만족해했다. 이때의 일을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에서 이렇게 적었다.“관아 한 곳에는 2층으로 된 창고가 있었는데, 황폐하여 퇴락한지 이미 오래됐다. 연못을 파고 아래
우연히 거칠고 못난 성질을 이야기하다가, 제 자신을 사슴에 비유했군요.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면 사슴이 잘 놀란다는 의미이지, 감히 제가 잘난체하거나 크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지금 그대의 편지에서 스스로 말꼬리에 붙은 파리에 비유하고 계시니, 어찌 그렇게 자신을 하찮게 여기시나요? 만약 그대가 작게 되기를 바란다면 파리도 오히려 크지요. 개미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일찍이 약산(평안도 영변)에 올라 산 아래 고을을 굽어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달음질치고 땅에 붙어 꿈틀꿈틀하는 모습이 마치 개미집의 개미와 같더군요. 바람이 한번 휙
작은 추위라는 뜻을 지닌 소한(小寒)은 계절을 24개로 나눈 절기 중 하나다. 이름으로만 보면 소한 다음 절기인 대한(大寒) 때가 가장 추워야 하지만 실제 우리나라에서는 소한 무렵이 가장 춥다. 소한 무렵은 정초 한파(正初寒波)라 불릴 정도로 강추위가 몰려오는 시기다. 소한과 관련된 속담으로는 “소한의 추위는 꿔다 가도 한다”라는 말이 전한다. 보통 소한이 가장 추울 때라서 소한 때만 되면 추워진다는 뜻이다. 이외에도 “대한이 소한의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 “소한에 얼어 죽은 사람은 있어도 대한에 얼어 죽은 사람은 없다.” “소
“오직 하늘만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니,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매여 있다. 그런데 사람이 하늘의 권한을 대신 쥐고 행하면서도, 삼가고 두려워할 줄을 몰라 세밀한 부분까지 명확하게 분별하지 못한다. 죽여야 할 자를 살리고 살려야 할 자를 죽이고도 부끄러움이 없다.”다산 정약용(1762∼1836)이 ‘흠흠신서(欽欽新書)’에 적은 집필 동기다. ‘흠흠欽欽’ 즉 ‘신중하고 또 신중하라’는 뜻. 겨울 냇물을 건너는 듯, 사방이 두려운 듯 신중할 것을 강조했다. 다산은 수사와 재판이 뇌물이나 권력의 압력, 사사로운 친분 세 가지
“지금은 토요일 오후, 동학사엔 함박눈이 소록소록 내리고 있다. 새로 단장한 콘크리트 사찰은 솜 이불을 덮은 채 잠들었는데, 관광버스도 끊긴 지 오래다. 등산복 차림으로 경내에 들어선 사람은 모두 우리 넷뿐, 허전함조차 느끼게 하는 것은 어인 일일까?”수필가 이상보 선생의 첫머리다. 계룡산에 갈 때마다 떠오르는 구절이다. 동학사에서 1.7km 오르면 갑사 가는 길목에서 애틋한 ‘남매탑’을 만날 수 있다. 한 수도승이 목에 큰 뼈가 걸린 호랑이를 구했다. 은혜를 입은 호랑이가 아름다운 처녀를 물어다 놓고 갔다. 처녀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 내가 탄 말은 털빛이 붉고, 갈기가 검다. 이마는 희고, 다리는 날씬하다. 발굽은 높고, 허리는 짤막하다. 두 귀는 쫑긋한 품이 참으로 단걸음에 만 리 길이라도 달릴 성싶다. 창대(마부 이름)는 앞에서 말고삐를 잡고, 장복(하인 이름)은 뒤에서 따라온다.안장 양쪽엔 주머니 한 쌍을 달았다. 왼쪽은 벼루, 오른쪽에는 붓 두 자루·먹 한 장·작은 공책 네 권에 이정표를 넣었다. 행장이 이렇듯 단출하니, 국경에서 짐 수색을 아무리 엄하게 한들 염려할 게 없었다.” 여정의 시작이다. 연암 박지원이 연행
“그걸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발굽이 두 쪽이어서 말이라고 하기 어렵고, 머리에 뿔이 없으니 소라고 하기도 어렵고, 양과 얼굴은 닮았지만, 털이 곱슬곱슬하지 않고, 또 등에 두 개 혹이 있으니 양도 아니고, 거위처럼 머리를 들고 장님처럼 눈을 떴습니다.”1780년 연암 박지원의 청나라 사신 길. 연암은 영안교를 건너 심양을 지나면서 깜빡 졸았다. 그때 몽골인이 몰고 가는 낙타를 지나쳐 버려 몹시 아쉬워했다. 호기심 많고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연암은 하인 창대에게 낙타 생김새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연암은 “낙타가 틀림없다”면
“경상도 아이들은 새우젓을 모르고, 강원도 사람들은 산사나무 열매(아가위)를 절여 장을 대신한다. 평안도 사람들은 감과 감귤의 맛을 분간하지 못하고, 바닷가 사람들은 새우나 정어리를 밭에 거름으로 쓴다. 그런데 어쩌다 이것들이 서울에 오면 한 움큼에 한 닢 값이니 어찌 그리 귀함은 무슨 까닭인가?”연암 박지원은 열하를 오가며 갖가지 수레를 세심히 관찰한다. 당시 북경에는 오늘날 고급 승용차와 같은 ‘태평차(太平車)’에서부터 화물 수송용 ‘대차(大車)’, 장사용 ‘독륜차(獨輪車)’ 군사용 ‘포차(砲車)’ 등 수없이 많은 종류의 수레가